우에다 겐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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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다 겐키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다. 189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했다. 이후 육군 소장, 중장을 거쳐 지나주둔군 사령관, 제9사단장을 역임하며 제1차 상하이 사변에 참전했다. 1932년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으로 다리를 잃었지만, 참모차장, 조선군 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관동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며 노몬한 사건을 겪은 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전후에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가 해제된 후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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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시게타로는 일본 제국 해군 군인으로, 해군대신과 군령부 총장을 역임하며 태평양 전쟁을 주도했고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 후 사면되었다.
우에다 겐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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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植田 謙吉 |
출생 | 1875년 3월 8일 |
출생지 | 오사카부, 일본 |
사망 | 1962년 9월 11일 (87세) |
모교 | 육군대학교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98년 – 1939년 |
계급 | 대장 |
지휘 |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제9사단장 조선군 사령관 관동군 사령관 |
주요 참전 | 시베리아 출병 소련-일본 국경 분쟁 할힌골 전투 중일 전쟁 |
정치 경력 | |
직책 | 관동주 장관 |
재위 기간 | 1936년 3월 6일 – 1939년 9월 7일 |
이전 | 미나미 지로 |
이후 | 우메즈 요시지로 |
기타 정보 | |
전역 후 활동 |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 향우 연맹 회장 |
NDLDC | 2960982/4 |
2. 생애
우에다 겐키치는 189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오사카부 출신으로, 육군 군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8월 육군 소장, 1928년 8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거쳐 제9사단장으로서 상하이 사변에 참가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중상을 입고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1]
이후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에서 일했고,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4년 11월 군사 참의관을 거쳐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재임 중 할힌골 전투 발발 및 패전의 책임을 지고 1939년 12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향우연맹 회장을 맡았고 1962년에 사망하였다.
2. 1. 군 경력
189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군인이 된 후 육군의 두 사단, 일본 군무국, 참모 본부를 거쳐, 시베리아 출병 당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가 되었다.[11]이후 교육 총감부와 기병 연대를 거쳐 1923년 8월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28년 8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11]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맡은 후에는 제9사단장으로서 상하이 사변에 참가하였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의해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8]

그 뒤에는 참모 본부에서 일했고,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4년 11월에는 군사 참의관을 맡은 후에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고, 재임 중에 일어난 할힌골 전투의 발발로 인해 전투가 끝난 후, 그 책임을 지는 형태로 1939년 12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7][9][10]
할힌골 전투 당시,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된 제23사단 담당 구역에서 처음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력한 소련군에 대응하기 위해 관동군 최고의 정예부대인 제7사단을 파견하자는 부하의 상신에 대해, 만약 자신의 담당 구역에 벌어진 사건을 다른 사단에 맡긴다면 자신은 할복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흥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동군 사령관인 우에다의 주도로 약체의 제23사단이 소련군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참패했고, 자신도 이에 책임을 지고 예편 처분되었다.
우에다의 군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연도 | 내용 |
---|---|
1898년 11월 | 육군사관학교 (10기) 졸업 |
1899년 6월 | 기병 소위 임관, 기병 제12연대 부속[11] |
1901년 11월 | 육군 기병 중위 |
1904년 8월 | 육군 기병 대위 |
1906년 11월 | 육군대학교 입교 |
1909년 12월 | 육군대학교 (21기) 졸업 |
1911년 4월 | 육군 기병 소좌 |
1916년 5월 | 육군 기병 중좌 |
1918년 12월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 |
1919년 7월 | 육군 기병 대좌[11] |
1919년 10월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작전 과장 |
1922년 11월 | 교육 총감부 부속 |
1923년 3월 | 기병 제1연대장 |
1923년 8월 | 육군 소장, 육군 항공부 부속 |
1924년 2월 | 기병 제3여단장 |
1925년 5월 | 마정 장관 |
1926년 3월 | 군마 보충부 본부장 |
1928년 8월 | 육군 중장[11] |
1929년 3월 | 중국 주둔군 사령관 |
1930년 12월 | 제9사단장 |
1933년 6월 | 참모차장 |
1934년 8월 | 조선군 사령관 |
1934년 11월 | 육군 대장[11] |
1935년 12월 | 군사 참의관 |
1936년 3월 | 관동군 사령관 겸 만주국 주차 특명 전권 대사 |
1939년 9월 | 참모 본부 부속 |
1939년 12월 | 예비역 편입 |
2. 2.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중상을 입고 왼쪽 다리가 절단되었다.[1]2. 3. 이후의 군 생활
1923년 8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1928년 8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맡은 후에는 제9사단장으로서 상하이 사변에 참가하였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의해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1]그 뒤에는 참모 본부에서 일했고,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34년 11월에는 군사 참의관을 맡은 후에 관동군 사령관이 되었고, 재임 중에 일어난 할힌골 전투의 발발로 인해 전투가 끝난 후, 그 책임을 지는 형태로 1939년 12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향우연맹 회장을 맡았고 1962년에 사망하였다.
우에다는 현역으로 남아 일본 제국 육군 참모 본부에 배치되어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부본부장으로 승진했다. 1934년, 우에다는 조선군 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11월 28일 대장으로 진급한 우에다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관동군 사령관으로 만주국으로 돌아왔다. 사령관으로서 우에다는 만주국과 북중국에서 불법 마약 거래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를 지지했다.[3]
1939년, 그는 또한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직을 역임했으며 최고 전쟁 회의의 구성원이었다.[4]
일본의 주요 적은 공산주의이며 일본의 운명은 인구 밀도가 낮은 북아시아 대륙의 천연 자원 정복에 달려 있다는 “북진론”을 강력하게 믿었던 우에다는, 만주국과 소련 국경에서 참모와 야전 장교들이 시작한 무단 공격을 지지했다. 이는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노몬한 주변에서 소련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와 많은 사상자를 낸 소련-일본 국경 분쟁으로 이어졌다.[5]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재앙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에다는 ''북진론'' 정책에 대한 지지를 굽히지 않았고, 그의 장교들이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는 1939년 말 일본으로 소환되어 강제로 퇴역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우에다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조용히 살았다. 전후에는 다양한 재향 군인 단체의 명예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에 사망했다.
1952년 공직 추방 해제 후[10]는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 향우 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연도 | 내용 |
---|---|
1918년 12월 27일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 |
1919년 7월 25일 | 육군 기병 대좌 |
1919년 10월 14일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작전 과장 |
1922년 11월 6일 | 교육 총감부 부속 |
1923년 3월 17일 | 기병 제1연대장 |
1923년 8월 6일 | 육군 소장, 육군 항공부 부속 |
1924년 2월 4일 | 기병 제3여단장 |
1925년 5월 1일 | 마정 장관 |
1926년 3월 2일 | 군마 보충부 본부장 |
1928년 8월 10일 | 중장 |
1929년 3월 16일 | 중국 주둔군사령관 |
1930년 12월 22일 | 제9사단장 |
1933년 6월 19일 | 참모차장 |
1934년 8월 1일 | 조선군 사령관 |
1934년 11월 28일 | 대장 |
1935년 12월 2일 | 군사 참의관 |
1936년 3월 6일 | 관동군 사령관 겸 만주국 주차 특명 전권 대사 |
1939년 9월 7일 | 참모 본부 부속 |
1939년 11월 14일 | 대기 |
1939년 12월 1일 | 예비역 편입 |
1955년 6월 |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 1957년 5월) |
1956년 5월 | 일본 향우 연맹 회장 (개칭) |
2. 4. 퇴역 이후
1939년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 일본 향우 연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에 사망하였다.[9][10]3. 훈장
수여일 | 훈장 |
---|---|
1934년 4월 29일 | 勲一等旭日大綬章일본어 -- |
1934년 4월 29일 | 功3級金鵄勲章일본어 -- |
1931년 9월 8일[16] | 勲一等瑞宝章일본어 -- |
1926년 7월 22일[15] | 勲二等瑞宝章일본어 |
1934년 5월 9일 | 勋一位景云章중국어 (만주국)[17] |
1937년 12월 1일 | 勋一位龙光大绶章중국어 (만주국)[18] |
1941년 12월 9일[6] | 大勋位兰花大绶章중국어 |
2등 орден Святого Станислава|오르덴 스뱌토보 스타니슬라바|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ru ![]() | |
은성 부착 Croix de guerre|크루아 드 게르|크루아 드 게르 훈장프랑스어 ![]() | |
Order of St Michael and St George|오더 오브 세인트 미카엘 앤드 세인트 조지|성 미카엘·성 조지 훈장영어 컴패니언 | |
Légion d'honneur|레지옹 도뇌르|레지옹 도뇌르 훈장프랑스어 오피시에 -- | |
4등 문화훈장한국어 | |
1941년 12월 9일[6] | 建国神廟創建記念章중국어 |
1944년 5월 1일[19] | 満州国国境事変従軍記章중국어 |
4. 평가 및 비판
우에다 겐키치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판단력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의 결정은 그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할힌골 전투 당시, 신병 위주로 구성된 제23사단 담당 구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부하들은 관동군 정예부대인 제7사단 파견을 건의했으나, 우에다는 자신의 담당 구역 문제를 다른 사단에 맡기면 할복하겠다며 반대했다.
결국 우에다의 주도로 제23사단이 소련군을 상대했으나, 관동군은 참패했고, 우에다는 책임을 지고 예편되었다.[1]
4. 1. 한국과의 관계
1932년 4월 29일, 우에다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왼쪽 다리를 잃었다.[1] 이 사건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장군이 사망했다.부상에도 불구하고 우에다는 현역으로 복무했으며, 1934년 조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2]
5. 추가 정보 (연보)
- 1898년(메이지 31년) 11월 - 육군사관학교 졸업
- 1899년(메이지 32년) 6월 27일 - 소위, 기병 제12연대 부속[11]
- 1901년(메이지 34년) 11월 3일 - 육군 기병 중위
- 1904년(메이지 37년) 8월 2일 - 육군 기병 대위
- 1906년(메이지 39년) 11월 22일 - 육군대학교 입교
- 1909년(메이지 42년) 12월 3일 - 육군대학교 졸업
- 1911년(메이지 44년) 4월 22일 - 육군 기병 소좌
- 1916년(다이쇼 5년) 5월 2일 - 육군 기병 중좌
- 1918년(다이쇼 7년) 12월 27일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
- 1919년(다이쇼 8년)
- * 7월 25일 - 육군 기병 대좌
- * 10월 14일 -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작전 과장
- 1922년(다이쇼 11년) 11월 6일 - 교육총감부 부속
- 1923년(다이쇼 12년)
- * 3월 17일 - 기병 제1연대장
- * 8월 6일 - 육군 소장·육군 항공부 부속
- 1924년(다이쇼 13년) 2월 4일 - 기병 제3여단장
- 1925년(다이쇼 14년) 5월 1일 - 마정 장관
- 1926년(다이쇼 15년) 3월 2일 - 군마보충부 본부장
- 1928년(쇼와 3년) 8월 10일 - 중장
- 1929년(쇼와 4년) 3월 16일 - 지나주둔군사령관
- 1930년(쇼와 5년) 12월 22일 - 제9사단장
- 1933년(쇼와 8년) 6월 19일 - 참모차장
- 1934년(쇼와 9년)
- * 8월 1일 - 조선군 사령관
- * 11월 28일 - 대장
- 1935년(쇼와 10년) 12월 2일 - 군사참의관
- 1936년(쇼와 11년) 3월 6일 - 관동군 사령관 겸 만주국 주차 특명전권대사
- 1939년(쇼와 14년)
- * 9월 7일 - 참모본부 부속
- * 11월 14일 - 대기
- * 12월 1일 - 예비역 편입
- 1955년(쇼와 30년) 6월 - 일본 전우 단체 연합회 회장(~쇼와 32년 5월)
- 1956년(쇼와 31년) 5월 - 일본 향우 연맹 회장(개칭)
참조
[1]
서적
Japan's War: The Great Pacific Conflict
https://archive.org/[...]
McGraw-Hill
1986
[2]
간행물
『官報』第1225号「叙任及辞令」
1931-01-31
[3]
서적
NarcoDiplomacy: Exporting the U.S. War on Drugs
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4]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5]
서적
Nomonhan, the Second Russo-Japanese War
[6]
간행물
『官報』1941年12月15日 敍任及辭令
https://ndlonline.nd[...]
1941-12-15
[7]
서적
『考古の巨星: 末永雅雄と橿原考古学研究所』
文藝春秋
1994
[8]
서적
『1932年の大日本帝国』
草思社
2020
[9]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https://dl.ndl.go.jp[...]
日比谷政経会
1949
[10]
뉴스
『朝日新聞』1952年3月19日夕刊一面
1952-03-19
[11]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列次名簿』(明治33年)
https://ndlonline.nd[...]
1900
[12]
간행물
『官報』第5587号「叙任及辞令」
1902-02-21
[13]
간행물
『官報』第535号「叙任及辞令」
1928-10-05
[14]
간행물
『官報』第1225号「叙任及辞令」
1931-01-31
[15]
간행물
『官報』第4176号「叙任及辞令」
1926-07-24
[16]
웹사이트
中野文庫 旧・勲一等瑞宝章受章者一覧
https://web.archive.[...]
[17]
간행물
『官報』第3037号・付録「辞令二」
1937-02-19
[18]
간행물
『官報』第3395号「叙任及辞令」
1938-05-02
[19]
아카이브
佐藤徳外十六名外国勲章記章受領及佩用允許の件
https://www.jaca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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